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이 발표될 때마다 반복되어온 역설—러시아는 환호하고, 중국은 조용히 박수치며, 정작 서유럽은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드러난다. 유럽이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으로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억울함을 토로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번 NSS는 “주권(sovereignty)”을 거의 신화적 수준으로 찬양하면서도, 정작 유럽의 내정과 정치 선택에 대해 전례 없는 간섭을 정당화한다. 미국이 유럽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배척해야 하는지, 나아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지까지 훈수를 두겠다는 태도는 미국-유럽 관계의 성격 변화가 표면화된 순간이기도 하다.
■ 대서양 동맹을 향한 노골적 공격,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전략 보고서가 공개되자 가장 즉각적으로 눈길을 끈 것은 대서양 양안 관계에 대한 ‘거친 공격’이었다. 올해 초 뮌헨안보회의에서 J.D. 밴스 부통령이 퍼부은 발언이 이제는 공식적인 국가 전략의 형태로 굳어진 셈이다. 그러나 칼럼은 이런 ‘적대적 레토릭’이 트럼프 행정부 외교의 본질적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보다 더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신(新)제국주의적 접근과 **아시아 동맹국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업가적 외교관’**이다.
■ 먼로 독트린의 부활: ‘트럼프 부칙’이라는 야심
수십 년간 사실상 방치해왔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워싱턴은 갑작스러운 ‘권력 재점유’를 선언했다. 파나마가 이미 사례로 등장했듯, 미국은 중국 견제를 명분 삼아 내정 간섭을 다시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틀을 만들어가고 있다.
칼럼은 이를 1823년의 먼로 독트린에 ‘트럼프 부칙’을 추가하려는 시도로 본다. 이는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뒷마당’으로 규정하며 국제 경찰권을 주장했던 순간과 나란히 역사책에 남길 계산이라는 것이다.
백악관 복귀 후 “평화 협상”을 줄곧 강조해온 트럼프가, 실제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역설적이다. 더구나 막대한 군사·재정적 부담은 고립주의 성향이 강한 MAGA 지지층에게도 즐거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 아시아 전략: 가치 없는 계산이 초래한 불안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접근은 더 복잡하고 모호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사실상 폐기한 채 ‘거래 비용과 이익’만을 기준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는 단기적 매력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이러한 태도가 “상호 호혜”가 아니라 **강압(extortion)**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과는 “상호 이익이 되는 경제 관계”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 이미 지역 전체의 전략 균형을 흔들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대만에 대해서는 현상 유지 원칙을 반복하는 정도에 그치는데,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외교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 원칙조차 안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 세계를 ‘세력권’으로 나누는 위험한 관점
이번 NSS의 기저에는 “힘이 큰 국가가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자연 법칙”이라는 명제가 깔려 있다. 러시아에 대한 유화, 중국에 대한 현실주의적 ‘봐주기’ 뒤에 자리한 것은 결국 세력권(spheres of influence) 체제의 복원이다.
문제는 이 접근이 서방 동맹뿐 아니라 중견국·소국을 포함한 전 세계 국가들을 미국-러시아-중국 중 하나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려는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 미국 내부 여론과의 단절
칼럼의 결론은 단호하다. 이번 전략이 미국 외교의 장기적 방향을 결정하는 ‘새로운 성경’이 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세계관은 미국 내 여론의 주류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 미국인은 여전히 러시아를 위협으로 보며, 우크라이나 지원과 나토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공화·민주 양당에 고르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번 보고서는 트럼프 개인과 그 측근 그룹의 세계관을 반영한 문서일 뿐, 미국 전체의 전략적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실이야말로 유럽과 동맹국들이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위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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